우리의 상처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 이주민들에게 K-방역이란 정보에서 소외되었다는 측면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고, 방역물품과 재난지원에서 배제됐다는 측면에서 차별이었으며, 전수검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과학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인권침해였을 뿐이었다. 이주민들이 기대야 했던 것은 K-방역이 아니라 체류할 수는 있지만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던 나홀로 방역이었다.
팬데믹 기간 '국민'만의 K-방역이 지속된 것은 한국 정부나 한국 사회의 이주민에 대한 인식 수준이 그대로 나타난 결과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주민을 결코 한국인과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방역과 지원 정책에도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 생존의 구호보다 우선한 코호트 격리 중심 집단 방역책은 재난 상황 시 거주시설 장애인의 존엄이 치안의 논리 아래 후순위로 밀려난다는 점을 보여준 명징한 사례였다. 국가는 거주시설 내 장애인을 감금 격리 대상으로 통제했고, 이들의 생명권과 자기 결정권 존중을 미뤄두었으며, 심지어는 죽음마저 회피할 수 없게끔 강제하는 참사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재난에 직면한 장애인은 시민성을 빼앗긴 채 이름 없는 타자로 취급됐다. 이들이 가진 삶에 대한 열망, 생존을 위한 의견은 집단 수용 방역 정책 앞에 무산되었다. 코호트 격리 앞 약자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평등한 과정을 원리로 삼는 현대 정치와 공정한 결과를 추구하는 공공 정책의 목적은 온데간데없었다. 권력과 자원의 몫을 지니지 못한 거주시설 장애인들은 목소리를 빼앗겼고, 목숨을 잃었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의지조차 차단한 잔혹한 팬데믹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어떤 정책 변화가 필요할까.

🔖 과연 한국의 팬데믹 대응은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라는 울리히 벡의 통찰로부터 얼마만큼 자유로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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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의 시간을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에 집중하여 '성공적인 방역'이라고만 기억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러한 방식의 기억은 지난 3년 동안 각자의 사회적 자리에서 팬데믹을 차별적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고,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위험을 가장 먼저 자신의 몸으로 감당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한국 사회가 배우고 변화해야 하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